고수칼럼/미녀53 칼럼

시장의 역사(1)

언덕위의바람 2020. 1. 17.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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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에 저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군요. ^^;

제가 굳이 그 소동에 참여하여 게시판을 더 시끄럽게 만들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법이고, 그러한 생각은 모두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실 시장에는 다양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장은 정체될 것이고,

수익의 기회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한가한 시간을 살려 저술활동에 열중해볼까 합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이 마당에 차트를 띄워놓고 케이스 토론을 하기는 어렵게 되었고,

대신 제가 오래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0. 역사의 중요성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유명한 정치가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는 옥중에서 그의 딸 인디라에게 서간문의 형식으로 세계의 역사를 가르칩니다. 훗날 인디라 간디 또한 인도의 총리가 됩니다. 이 편지들을 책으로 엮어 펴낸 것이 <세계 역사 이야기 GLIMPSES OF WORLD HISTORY>입니다.

 

네루는 역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그의 딸에게 설파했으며 그의 방대한 역사지식을 흥미롭게 엮어냅니다.

 

인간이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원칙으로부터 개별적인 사실들을 추론해내는 방법입니다. 수학과 물리학이 그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어떠어떠한 법칙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모든 명제들은 개별 명제들을 추론해내는 디딤돌이 됩니다. 이를 연역적 추론(DEDUCTIVE REASONING)이라고 부르지여.

 

다른 하나는 개별적인 사실들을 모아 일반적인 원칙을 추론해내는 방법입니다. 이를 귀납적 추론(INDUCTIVE REASONING)이라고 하며, 수학과 물리학과 같은 엄밀한 과학 외의 자연과학이 이러한 추론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학문의 역사상 가장 최근에 나타난 것인데, 통계적 추론(STATISTICAL REASONING)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대상을 이분법적으로만 기술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질입니다. 너무도 다양한 변수가 개입되기에 깔끔하게 떨어지는 법칙으로 현상을 기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계학자들은 과거의 데이터를 모아 이들을 확률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분석하여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이미 대부분의 사회과학에서는 통계적 접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식시장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단연코 우리가 취해야 하는 방식은 통계적인 접근입니다.

주식에서는 '반드시'라는 말이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라는 우회적인 표현이 남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이는 주식시장의 복잡성을 감안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일례로 애널리스트들이 경제 데이터를 분석하는데는 통계학이 빠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통계적 추론을 하기 위해서 절대 불가결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거의 데이터입니다.

그리고 통계학의 특성상 표본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 유의미한 결론이 도출됩니다. 이를 통계에서는 대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S)이라고 합니다.

 

이 말인 즉슨, 우리가 시장으로부터 어떠한 유의미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으려면 방대한 과거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뜻이고, 그러한 과거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시장의 역사를 공부해야 합니다.

 

투자의 고수들이 경험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만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습득된 데이터들이 우리의 뛰어난 뇌에 의해 통계적으로 분석되어 직관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여담이지만 시장을 오래 겪은 사람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그 사람이 시장에서 돈을 크게 잃을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의 의견은 더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증시 속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실수로부터 더 크게 배우는 법이며, 그러한 실수를 더 많이 저질러본 사람일 수록 더 훌륭한 직관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시 리버모어가 말했듯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시장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첫번째 과제는 시장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간접적으로나마 우리에게 경험의 형태로 저장되어 미래에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제가 시장의 역사에 대해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변론은 이 정도로 해두겠습니다. 더 길어지면 자칫 지루해질 소지가 있기 때문에..

 

1. 거래소의 설립

 

시장의 역사에 대해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과연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이야기할 것인가 아니면 흥미를 끄는 순서로 친숙한 주제부터 건드려 최종적으로는 모든 역사를 포괄할 수 있는 접근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적인 순서대로 기술을 하자면 우리나라의 경우 증권시장의 모태라고도 할 수 있는 19세기의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의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 이 시장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이 시장의 거래방식은 현물 거래가 아닌 선물 거래였으며 쪽바리들이 조선인들의 돈을 합법적으로 뺏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다 보면 너무나도 먼 과거의 얘기가 되어버리기에 일단 미루기로 하고 오늘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거래소의 설립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증권거래소가 설립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인 1956년 2월입니다. 증권거래소는 금융단, 증권단, 보험단이 각각 1억 환씩 출자하여 설립된 민간 법인이었지만 사실상 정부가 모든 것을 관리했습니다. 당시에 상장된 주식은 12개 종목이었고 채권은 국채 3종목이었습니다. 궁금해하실 분을 위해 12개의 상장 주식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증권거래소, 연합증권금융, 조흥은행, 저축은행, 한국상업은행, 흥업은행, 대한해운공사, 경성방직, 대한조선공사, 경성전기, 남선전기, 조선운수.

 

위의 종목들은 1956년 3월 3일 상장되었습니다. (본 자료는 한국증권거래소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비록 증권회사들이 점두 거래로 이루어지던 증권거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거래소를 설립하였지만 초창기에는 이러한 목적이 달성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보시다시피 상장 주식수가 12개로 제한되어 있었고 그나마 대부분의 지분을 정부가 보유하고 있어 유통물량이 적었던 까닭입니다.

 

거래소 설립을 추진했던 것이 바로 증권사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활발한 증권 거래로 수익을 얻는 것은 증권사 뿐입니다. 동시에 증권사는 자기 스스로 투기의 장에 참여하기 위해 풍부한 유동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거래소가 설립되기 이전 대한증권을 포함한 5개 증권사가 증권업협회를 설립했고, 1955년 1월에는 정부의 인가를 받아 '협회 증권매매 규약'을 제정했습니다.

 

금융가들이 정부와 결탁하여 대중의 돈을 빨아먹을 합법적인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즉, 카지노를 설립한 것이죠.

(초창기의 거래소가 정말 카지노였는지는 뒤이어 이어지는 역사로 분명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증권시장의 모태입니다.

애초부터 세력이 있었고, 그들은 증권거래를 조장해 수익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정부는 결국 힘 있는 자의 손을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정부는 단 한번도 진실로 약자의 손을 들어준 적이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약할 때는 힘으로 민중을 억압했고 민주주의의 씨앗이 조금 파종된 후부터는 표를 얻기 위해 민중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힘 있는 자는 언제나 정부를 이용해 자신이 합법적으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제도와 장치들을 마련해왔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렇게 해서 형성된 기득권은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어쩔 수는 없지여.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자면 거래소가 설립된 초창기에 주식의 거래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국채 거래대금이 전체 거래대금의 70%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이때의 거래는 현물 거래가 아닌 매매체결 1~2개월 후에 결제하는 선물 거래와 유사한 방식이었으며 결제 기간 내에서는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었기에 투기가 조장될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시나 이러한 밑거름은 오늘날 국채파동이라고 일컫는 사태를 초래했습니다.

 

국채파동의 전모는 대강 이렇습니다.

1957년 9월, 180억 환에 이르는 제11회 국채발행 계획을 앞두고 정부는 153억 환 규모의 외환특별세법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자, 생각해봅시다. 만일 이 법이 통과된다면 정부는 충분한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러면 굳이 180억 환에 달하는 국채를 발행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머리를 조금 더 굴려볼까여?

만일 세금이 충분히 걷혀서 국채를 발행하지 않게 되면 국채 공급량이 줄어들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국채 가격은 급등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간파한 증권사들이 과연 국채를 안 사들일까여? 당연히 사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력의 본능적 행태입니다. 세력은 큰 수익의 가능성이 포착되면 거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수익대상을 사들입니다.

 

실제로, 증권사들은 국채의 대량 매집에 나서게 됩니다. 물론 철두철미한 이들이 단순한 가능성만 보고 달려든 것은 아니고 국회 재정경제부 위원들로부터 국채를 발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정보를 듣고 난 후 액숀을 취한 것이져.

 

결국 12월 국회는 제11회 국채발행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제10회 국채는 15환 정도에서 40환정도까지 3배 가까이 급등합니다. 증권사 세력들... 대박이 났습니다. 이제는 물량을 개투들에게 떠넘기기만 하면 될 뿐...

 

근데 예상 외로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국채 가격이 급등하면서 과열 징후가 포착되자 정부는 갑자기 원래의 계획대로 제11회 국채발행을 통과시키고 대신 외환특별세법의 통과를 보류해버립니다. 미친 짓을 한 거죠.

 

그 결과는 말을 안해도 아시겠지여? 국채는 폭락세로 돌변합니다. 그러자 증권사 세력들은 어떻게 했을까여?

필사적으로 매수 방어에 나설 수 밖에 없었겠져. 매집한 금액이 너무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손절매 같은 건 그들에게 있어서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ㅎ

 

그러면서 국채 매물의 압박과 증권사의 결사 매수 대응에 따라 시세는 올랐다 내렸다 난리를 치다가 1월 16일에는 거래대금이 20억 환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양쪽 다 증거금 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되죠. 소위 말하는 마진 콜(MARGIN CALL)이 발생한 겁니다. 그러자 증권거래소는 긴급회의를 열어 17일 오전장을 일시 중단시키고 전날 거래분에 대해서는 일단 50%만 납부하도록 조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개 증권사는 결제를 이행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재무부 장관이 나서서 1월 16일 이뤄졌던 모든 매매를 취소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여. 정말 어이 없는 코미디입니다. 어쨌든 이를 통해 국채파동은 겨우 수습이 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바로 국채파동의 전모입니다. 동시에 거래소가 설립된 후 자행되었던 최초의 주가 조작 사건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건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세력이 정부와 결탁한다는 사실? 다 알고 있었던 얘기 아닙니까?

세력이 정보의 먹이 사슬의 위쪽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도 새삼스러운 얘기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세력이 투기에 실패하면 시장이 교란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세력이 손실을 입도록 놔두지 못합니다.

 

이 경우 정부는 거래를 무효화하는 어이 없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오늘날은 다르냐구요? 아니죠. 최근 미국에서 망해야 마땅한 금융권에 천문학적 금액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져. 세력이 실패하면 시장은 야단이 납니다.

 

베어링 은행이 파산했을 때 세계 증시는 어떻게 반응했었져? LTCM이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파산했을 때는? 최근 리먼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말씀 안 드려도 알겠지만 거대한 세력이 파산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시장은 대환란을 겪습니다. 개투들이 이러한 대환란 속에서 피를 토하게 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구여!

 

시장이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력이 돈을 벌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력이 개투의 돈을 빨아먹는 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여. 서글픈 현실이지만 정부는 시장의 안정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구조를 용인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시장의 중요한 진실 중 한 가지입니다.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자면 거래소가 카지노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1961년 말 증권가에는 거래소가 조만간 주식회사로 바뀔 것이라는 풍문이 돕니다. 이러한 풍문에 가만히 있을 우리의 증권사 세력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당연히 거래소 주식을 대량 매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세력의 본능적 행태라고 했져? 그들은 확실한 수익의 가능성 앞에서는 매우 공격적이 됩니다. 개투들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1962년 4월, 증권거래법이 시행되면서 증권거래소는 주식회사로 탈바꿈합니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여?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여. 전 국민이 가세합니다. 그들은 이 투기 열풍에 동참하여 시세를 37환까지 대략 3배 이상 폭등시켜 버립니다. 개투들은 거래소 주식이 너무 비싸지자 묻지마 투자로 다른 종목을 매수해대기 시작하고 결국 주가지수는 1월에서 5월 사이 40포인트에서 280포인트로 7배 상승합니다.

 

이런 국면에서 과열을 우려하여 공매도에 나섰던 증권사들은 모조리 쪽박을 찼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상 초유의 결제 불이행 사태에 빠지게 됩니다. ㅋㅋㅋ

 

이를 두고 증시 역사에서는 5월 파동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정부는 또 어떻게 대응했을까여?

당연히 거래소는 휴장을 하고 증권사들은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결제를 마칩니다.

이거야 원... 돈 잃으면 정부가 계속 메워주니...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거래소는 그 신뢰도가 크게 추락하게 됩니다. 결국 시장을 열 때마다 대규모 물량이 출회하면서 대폭락이 연출되자 정부는 급기야는 1963년 2월 25일 거래소의 무기한 휴장을 선언합니다.

 

5월 파동의 진실은 무엇일까여?

 

사실 5월 파동은 중앙정보부 공화당 창당자금을 끌어오기 위해 증권계와 짜고 주가를 올린 사건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이후에도 1964년에는 해동화재주 작전, 1970년에는 증권금융주 파동 등이 성행하면서 거래소 설립 후 10년 동안 온갖 투기와 작전으로 얼룩진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여러분.

거래소는 처음부터 카지노였습니다.

다만 초창기에는 정부가 카지노의 안정적인 운영에 미흡했고 세력들 또한 자주 파산하며 시장을 교란시켰습니다.

 

노인분들이 주식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러한 시대를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이 시대에 그토록 투기가 창궐했는지에 대해 이유를 정리해보면

 

1) 시장 규모가 너무 작았다.

예를 들어 5월 파동의 주범이었던 윤응상씨는 작전의 베테랑으로 증시를 좌지우지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몇 천만원의 자금으로도 시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시절이니까여.

 

2) 증권사 수가 너무 많았다.

따라서 수수료 경쟁에 불이 붙어 그것만으로는 경영이 되지 않자 스스로 공격적인 투기를 감행했던 것입니다.

 

3) 레버리지를 이용한 선물 거래 방식이었다.

결국 과도한 레버리지 사용이 위에서도 보았던 여러번 결제 불이행 사태를 초래하며 시장을 마비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거래소 설립의 초창기 시절을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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