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칼럼/미녀53 칼럼

시장의 역사(5)

언덕위의바람 2020. 1. 17.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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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분이 제 프로필 사진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해주셨네여.

인기글로 선정되고 많은 사람들이 읽는데 제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듯 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여.. 프로필 사진을 바꿉니다.

요즘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손담비 양입니다. (^o^)/

만일 이 프로필 사진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여.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볼까여? ㅎ

 

저번 글에서 증시 개방과 함께 일어났던 내재가치 혁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당시의 대세상승장을 살펴보면서 이에 우라카미 쿠니오의 장세사이클 구분법을 적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그래도 한번 복습해보지여.

 

우라카미 쿠니오에 의하면 주가에도 4계절이 있습니다. 그는 각각을 금융장세, 실적장세, 역금융장세, 그리고 역실적장세로 구분하였습니다.

 

사이클은 경기가 심각하게 침체되어 있는 상황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경기가 침체되어 있을 때는 투자와 소비가 모두 심각하게 위축이 되고 돈을 빌리려는 사람보다 갚으려는 사람이 많아져(이를 식자들은 디레버리징(DELEVERAGING)이라고 하지여) 유동성이 크게 감소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반적인 자산가격의 디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되고 이로 인한 역 부의 효과가 발생하여 소비는 더더욱 위축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이렇게 되면 정부에서는 경기 부양을 위해 나서게 되는데 크게 금융정책 재정정책의 측면에서 접근을 하게 됩니다. 이중 먼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금융정책인데 이는 주로 중앙은행의 공개시장조작(OPEN MARKET OPERATIONS)이나 법정지급준비율(RESERVE REQUIREMENTS) 인하, 그리고 재할인율(DISCOUNT RATE) 인하 등의 방식으로 통화량을 증대시킵니다. 결국 통화량이 증가하면 금리가 떨어지게 되고 고금리 메리트로 채권이나 예금에 몰려 있던 자금들은 서서히 주식시장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경기는 여전히 침체되어 있지만 돈이 주식시장으로 유입되기 때문에 경기회복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증시가 상승하는 국면이 오게 되는데 이를 금융장세라고 합니다. 금융장세는 다른 이름으로 유동성 장세라고도 합니다.

 

주가가 어느 정도 부양이 되고 최악의 상황은 지나갔다는 인식이 퍼지게 되면 산업자본들은 저금리의 메리트에 의해 위축되었던 투자심리를 회복하게 되고 이에 따라 설비 투자 증가, 고용 증가 등이 일어나면서 자금 수요가 조금씩 증가하게 됩니다. 그러면 금리는 바닥을 치고 서서히 오르게 되지여. 고용이 증가하게 되면 소비가 뒤따라 증가하게 되고 그러면 기업의 매출이 증가하는데 이에 반해 여전히 금융비용이 낮게 유지되기 때문에 기업의 실적은 호전됩니다. 그러면 주가는 이러한 펀더멘털 요인을 바탕으로 상승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이러한 국면을 실적장세라고 합니다.

 

기업들의 실적이 하나둘 호전되고 점점 더 많은 기업들이 투자에 참여하기 시작하면 자금의 수요는 계속 증대되므로 금리는 계속 상승하기 시작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높아진 금융비용이 실적에 부정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가는 천정을 치고 하락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를 역금융장세라고 합니다.

 

실적의 악화를 감지한 산업자본들은 서서히 투자를 줄이기 시작하고 이는 소비의 감소로 일어나면서 금리는 정점을 지나 하락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기업간 경쟁 및 높은 금융비용에 의해 실적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주가는 더 하락하는 국면이 나타납니다. 이를 역실적장세라고 합니다.

 

우라카미 구니오의 이론은 금리 실적이라는 두 가지 변수와 주가와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꽤 유용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교조주의적으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한데 특히나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경제에서는 환율, 원자재 가격 동향, 유가 동향 등의 여러가지 추가적 변수가 기업의 실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론은 외부적 변수가 대체적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될 때 가장 잘 들어맞는 하나의 모델로써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5. 신3저와 반도체 특수, 그리고 블루칩 장세

 

먼저 큰 그림을 보기 위해 이 당시의 차트를 우라카미 쿠니오의 4국면으로 나타낸 뒤 각 시기에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89년 1015포인트를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한 증시는 자그만치 4년 가까이 하락장을 지속하며 급기야는 1992년 8월 456포인트를 찍게 됩니다. 제가 이 당시에 주식판에 없었기에 다행입니다. 주가지수 선물시장은 1996년 5월 5일까지는 개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락에 베팅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 이 당시에는 현물 밖에는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바닥을 모르고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는 증시 속에서 4년 내내 고군분투한 개미가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쪽박을 차고도 거덜나 서울역 앞으로 나앉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강한 추세가 이처럼 잔인할 수도 있음을 역사로부터 반드시 배우시길 바랍니다.

 

증시의 역사에서 재미있는 점은 또한 심리적 지지선이나 저항선이 붕괴된 뒤 진정한 천정과 바닥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지지선이나 저항선은 전고점과 전저점 근처에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투자자들의 심리 때문에 정수 지수가 심리적으로 지지선이나 저항선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존 J. 머피의 <금융시장의 기술적 분석> 참조)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1000포인트, 500포인트, 2000포인트 등 정수 지수의 돌파 혹은 붕괴에 의해 심리가 더 흥분되거나 침체되는 경향이 있는데 최근의 증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심리를 역이용하여 정수 지수대를 돌파 혹은 붕괴된 후 생기는 반전이 대천정과 진바닥을 형성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불트랩이나 베어트랩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1992년 하반기 사회분위기는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7월에 신행주대교가 붕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대우 김우중 회장의 신당창당설이 나돌면서 증시는 500포인트를 붕괴시키며 투자자들의 마지막 희망까지도 날려버립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가 바닥이 임박한 순간이었습니다. 

 

정부는 바닥을 모르고 빠지는 증시를 부양하기 위해 8월 24일 부양책을 내놓게 되는데 이를 두고 '빨리 사(8.24) 조치'라고 부릅니다. 빨리 사 조치에 포함된 것은 시중 금리의 하향 안정화 방안, 기관의 주식매수 방안, 투신사 자사주 펀드 허용, POSCO와 한국전력에 대한 외국인 매수 허용 등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관 주식 매수 방안이 골치를 때리는데 이를 보면 정부가 얼마나 강한 세력인지를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재무부는 은행에게는 신탁계정 월별 수탁고 순증가분의 25%로 주식을 사라고 지시했고, 보험사에게는 보험수지차액의 20%로 주식을 사라고 지시했습니다. 한편 연기금에게는 1년간 1조원 이상의 돈을 증시에 퍼부으라고 권유했습니다. 지난 해 말 이명박 정부가 연기금을 동원해 저점 사수를 한 것과 유사하지여?

 

정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이 없게도 기관은 주가가 안정될 때까지는 순매수만을 유지하도록 강요받았는데 당국에서는 산하 기관의 주식매매 동향을 매일 체크하고 감독하여 재무부에 보고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 자유시장에서는 일어날 수도 없는 어처구니 없는 조치였지만 그 효과는 증시에 빠르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위의 주봉 차트를 보면 시세는 456포인트를 찍고 장대 양봉을 하나 만들게 되는데 이 양봉이 빨리 사 조치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증시는 상승세로 돌아서면서 저항선을 돌파하며 올라갔습니다. 동시에 금리의 급격한 하락이 일어났는데 시중금리를 기준으로 보면 1년 동안 20%에서 12%까지 무려 8%나 하락했습니다. 그러나 증시에 유동성이 풀리면서 고객예탁금은 3조원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 외국인들이 일찌기부터 군침 흘리고 있었던 포스코와 한국전력에 대해 매수가 허용되자 저PER주에서 크게 해먹고 어디로 들어갈까 고민하던 외국인들은 공격적으로 이들을 매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억지스런 조치로 증시는 부양되기 시작했지만 실물 경기는 여전히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금융장세로 보는 것은 상당히 적절합니다.

 

금융장세의 끝자락에서 나타난 조정은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촉발되었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93년 8월 12일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실시된 금융실명제입니다. 시장은 이에 크게 출렁였지만 곧 이것이 장기적으로 악재라고 볼 수만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시세는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서서히 실적 장세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후 금리는 93년 8월을 기점으로 상승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가는 기업 실적의 호전을 바탕으로 상승을 이어갔는데 이때의 주도주들로는 삼미특수강, 한보철강, 대우통신 등의 저가대형주들이었습니다. 위 차트에서 실적 장세의 첫번째 상승파동이 바로 저가 대형주 장세에 해당합니다. 이는 우라카미 쿠니오가 실적장세의 전반부는 소재산업에 속하는 저가대형주들이 선도한다라는 지적과 일치하는 결과였습니다. 소재산업은 경기가 좋아지면 그 수요가 광범위하게 증가하므로 경기호전에 가장 먼저 반응하게 됩니다.

 

이 당시 금융장세에서 실적장세로의 이동을 가능케 했던 가장 핵심적인 요인에는 '신(新) 3저(低)'로 불리는 엔고(달러 약세), 글로벌 금리 하락, 유가하락 요인과 '반도체 특수'로 불리는 기업실적 호전 요인이 있습니다. 각각이 왜 실적 장세를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는지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93년 상반기, 미국 클린턴 정부는 1,000억 달러에 이르는 대일본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엔고를 용인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자 엔화가치는 폭등세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게 큰 반사이익을 안겨 주었습니다.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던 자동차, 전자, 조선주들의 수출경쟁력이 크게 증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엔고에 의해 우리 증시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한편 2년 넘게 지속되어 온 경기불황을 타계하기 위해 1992년 선진국들은 일제히 금리 인하 공조체계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결과 선진국 경제에 급격한 유동성 팽창이 일어나면서 소비가 증가할 여건이 마련되었던 것입니다. 이 또한 이들을 상대로 수출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에게는 큰 호재였던 것이지여.

 

마지막으로 이 당시 국제유가는 배럴 당 16달러 정도였는데 이는 이라크가 수출을 재개하면서 원유 공급이 늘어나고 냉전체제가 종결되면서 정치적 리스크 또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원유를 전적으로 대외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우리나라는 여기에서도 원가 절감이라는 강력한 우군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3저 효과를 가장 톡톡히 본 업종은 뭐니뭐니 해도 반도체 업종인데 이는 4메가 D램의 최대 수요처인 미국 컴퓨터 업체들이 발주처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1994년 국내 반도체 수출액은 1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때마침 D램 경기가 호황을 누리고 있었던 점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실적 장세의 제2상승국면을 장식한 종목들은 반도체 업체인 삼성전자를 포함한 블루칩(BLUE CHIP)이었습니다. 삼성전자는 이 기간 동안 40,000원에서 14만원까지 올라가는 폭등세를 보여주었습니다. POSCO는 93년 11월 3만원을 돌파한 후 9월 9만원까지 올랐습니다. 그 외에도 현대차, LG전자 등이 장세를 이끌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앞의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산주로 부각된 중소형 우량주들이 폭등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또한 우라카미 쿠니오의 '실적장세의 후반부는 가공산업에 속하는 종목들과 중소형 우량주들이 선도한다'라는 지적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반년 넘게 소강상태를 보이던 주가는 막판 불꽃을 발생시키게 되는데 이때는 개투들이 상투 근처에서 마구잡이로 주식을 사는 버블의 막바지 단계였지여. 장기간 소외되었던 종목들까지 동반 상승하면서 종합주가지수는 1100포인트를 돌파하게 됩니다.

 

94년 11월, 1145포인트에서 꼭지를 친 증시는 역금융장세로 돌입하게 됩니다. 이때 대다수의 종목들이 하락세로 접어들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신고가를 경신하며 올라갔던 종목들이 있었으니 이는 삼성전자, 삼성화재, SK텔레콤, 현대차, POSCO 등의 초우량주들이었습니다.

 

초우량주들 마저도 상투를 치고 장기하락국면으로 접어들자 늘 그렇듯 잡주들의 장세가 나타납니다. 성장성을 무기로 대중들의 기대를 먹고 날아다닌 개별 테마주들은 늘 역실적 장세의 끝자락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다들 아시져? 모든 투자자들을 초토화시킨 IMF입니다.

 

우리는 우라카미 쿠니오의 장세 구분법이 실제 우리 증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라카미 쿠니오의 장세구분법은 여전히 장세를 진단하는데 있어서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이러한 구분법은 글의 초두에서도 밝혔듯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번째 한계는 위에서도 밝혔듯 이 모델이 폐쇄 경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환율이나 원자재 가격의 변동과 같은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번째 한계는 이 모델이 경기순환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리한 독자라면 알아차렸겠지만 정부가 유동성을 푼다고 해서 반드시 산업자본이 이에 반응해 설비투자를 늘리는 것은 아니며 시중자금이 증시로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찌기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즈(KEYNES)는 시중에 유동성이 지속적으로 공급됨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침체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는 현상을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러한 현상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장세구분법이 탄생한 일본 증시에서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일본은 92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금리를 낮추어 제로 금리 시대를 열었으나 금융장세와 실적장세는 나타나지 않고 주가는 끊임없는 하락세를 보이며 오늘날 '잃어버린 10년'으로 지칭하는 침체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일본 경제는 왜 공격적인 금리 하락에도 반응하지 않고 경기순환론의 모델에서 벗어나 버린 걸까여? 그 이유는 1980년대 후반의 일본 경제가 말 그대로 버블경제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1980년대에 끊임없이 경상수지 흑자를 누적해가며 세계 제일의 채권국이 되었고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환율이 급등하면서 JAPAN MONEY의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일본의 자금은 전세계로 퍼져 뉴욕 맨해튼의 고층 빌딩을 사들이고 COLUMBIA PICTURES를 인수했습니다. 일본 열도 전체에서는 은행 대출을 바탕으로 한 부동산 투기 붐이 일어났습니다. 은행 대출이 이토록 늘어난데는 정부의 저금리 기조로 예대 마진만으로는 은행 영업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행은 부동산 담보대출을 남발하며 부동산 투기에 나섰던 것이지여. 증시에도 과잉 유동성이 몰리면서 버블을 양산해냈고 이때 증시에 들어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부동산에서 크게 재미를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업들 또한 증시로부터 자본을 조달받는 것이 아니라 기업 내 쌓인 이익잉여금으로 주식시장에서 재테크에 열중하는 웃지 못할 현상까지 벌어졌습니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이러한 초대형 버블의 붕괴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국면에서는 아무리 금리를 낮춰 추가 유동성을 공급하려 해도 이미 범람한 유동성에 익숙해 있던 일본 국민들에게는 씨알이 먹히지 않았는지도 모르지여.

 

우리는 다시 한번 교조주의를 경계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라카미 쿠니오의 이론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매우 유용하지만 분명한 한계 또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투자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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