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칼럼/미녀53 칼럼

시장의 역사(4)

언덕위의바람 2020. 1. 1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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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투자(VALUE INVESTMENT)는 언제부터 우리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을까여?

 

저는 교조적 펀더멘탈리즘을 싫어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전 모든 형태의 교조주의를 싫어합니다.

교조주의자들은 현실 그 자체를 보지 못하고 텍스트로 현실을 가공하려 듭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대중들을 사로잡는 사상이나 철학은 인생과도 같이 그 수명이 있습니다.

교조적 사상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다양한 패러다임의 한 형태일 뿐 영원불멸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떠한 패러다임은 역사를 통해 재답습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나 모두 통한다는 주장은 합리적 근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회현상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교조주의는 인간의 인식 형태입니다. 인간의 인식과 행동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떠한 사상이 옳아서 현실에 적용된다기 보다는 그러한 사상의 추종자가 많기 때문에 그 사상이 현실 속에 실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이번 글에서 보여드리고 싶은 것은 가치투자자의 가장 강력한 지표 중 하나인 저PER과 저PBR이 어떻게 국내 투자자들 사이에 전파되고 정착되었으며 한 시대를 풍미했는지입니다.

 

4-1. 외국인의 등장과 내재가치 혁명

 

1992년 한국 증시는 외국인에게 장내 주식 매입을 허용합니다. 이를 증시 개방이라고 합니다. 증시는 3저 호황의 붕괴로 초토화되어 있던 터라 증시 부양을 위해 외국계 자본을 끌어와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면개방을 한 것은 아니고 종목 당 발행주식의 10% 한도 내에서 외국인의 매입을 허용했습니다. 드디어 오늘날 우리 증시의 3대 투자주체의 하나인 외국인이 무대에 등장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우리 증시를 선도하는 주도세력이 개편됩니다.

 

아시다시피 외국인이 우리 증시에 들어오기 전에 국내 투자자 사이에서는 체계화된 투자의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개투들은 물론이고 기관투자자들 또한 정보 매매와 작전성 투기 등에 몸담았을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으로 증시 개방이 되기 이전에는 주식의 내재가치(INTRINSIC VALUE)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모든 종목은 그 종목이 속한 업종을 따라 동조화되어 움직이는 경향이 강했고 그에 따라 테마장세와 같은 건설주 장세과 트로이카 장세 등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외국인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선진 투자기법을 이머징 마켓에서 적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PER은 1920년대에 미국에서 처음 생겨났습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PER(Price-Earning Ratio)란 기업의 수익가치에 비해 주가가 얼마만큼 평가받고 있느냐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1년에 100억의 순이익을 내는 기업의 시가총액이 1000억이라면 PER은 10이 되는 식이지여. 또 달리 표현하자면 PER이 10이라는 것은 이 기업을 인수하여 본전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대략 10년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미국에서 PER이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이며 1960년대에는 유럽으로도 보급되었고 급기야는 일본 시장에서도 이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인들의 입장에서 우리 시장에 처음 들어오고 보니 우리나라에는 PER이 형편없이 낮은 기업들이 수두룩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러한 저PER주가 왜 그토록 우리 시장에 범람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식의 가치는 크게 보면 보유가치 투기가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유가치란 주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주식의 가치를 말하며 투기가치란 주식의 잠재적인 시세변동을 통해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가치입니다.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보유가치 속에는 배당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되고 주로 대주주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주주총회에서 기업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까지 대부분의 주식은 가장 큰 지분을 확보한 대주주가 주인이었고 이들은 평소에는 지분을 보유가치의 측면에서 가지고 있다가 돈이 필요할 때쯤 되면 증권사 세력과 담합하여 주가를 올려 지분의 일부를 매각했다가 폭락시켜 되사는 식의 투기용도로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주가는 해당 기업의 가치를 반영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증시 개방 전의 우리 증시는 후진 증시의 전형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거대자본을 끌고 우리 증시로 상륙한 외국인들은 10% 보유한도에 대한 규정만 없었다면 싸고 좋은 기업을 통째로 인수해버릴 기세로 덤벼들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열심히 기업 탐방을 다니면서 '저평가주'를 수색해냈고 증시 개방 첫날부터 막대한 자금을 증시에 퍼부으면서 만년 소외주들을 줄상한가로 밀어올려갔습니다. 우리 증시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기존 증시를 주무르던 기득권 세력판도에도 변화의 조짐이 불었습니다.

 

실제로 1992년도 상반기 KOSPI 지수는 약세흐름을 이어갔으나 외국인들의 매기가 붙은 종목은 상한가를 내달리는 모습을 연출하여 개투들을 경악시켰습니다.

 

저PER 종목들이 외인들의 매수세로 대폭발했던 이 시기를 PER혁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PER주 장세의 중심에는 태광산업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태광산업이 얼마나 강하게 분출했는지를 살펴봅니다.

 



저점 43900원에서부터 2년 동안 54만원까지 10배 폭등하는 대시세를 연출했습니다.

이 시세의 특징적인 부분은 또한 2차례에 걸쳐 시세가 분출했다는 것인데, 20주 이평선을 붕괴한 후에 60주 이평선의 지지를 받고 2차 시세를 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태광산업 외에 저PER혁명에 동참했던 종목들로는 한국이동통신, 백양, 대한화섬 등이 있습니다.

 

1993년 하반기에는 '자산주 열풍'이 일어납니다. PER이 투자자의 관심을 끌자 곧이어 저PBR주에 대한 관심이 시장을 달구었던 것입니다. PBR(Price-Book value Ratio)은 어떠한 주식의 순자산 대비 주가가 얼마나 평가받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이때 순자산에 포함되는 항목으로는 대개 회사 소유의 부동산, 현금 등이 있는데 이러한 순자산을 모두 합한 가치보다 시가총액이 작을 때 PBR은 1 이하가 되며 청산가치 대비 저평가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시가총액이 1000억인 어떤 기업의 땅과 부동산 가치가 2000억이라면 누군가 이 기업을 1000억에 인수하여 2000억이 팔아버리면 1000억의 차익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자산주 열풍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먼저 저PER혁명으로 인한 내재가치에 대한 시장참가자들의 관심이 고조된 상태에서 10% 이내의 지분보유제한을 명시하는 증권거래법 200조가 폐지될 것이라는 풍문이 퍼졌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대자본을 소유한 외국인들이 청산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종목들에 대한 적대적 M&A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주주들의 지분방어전이 펼쳐지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 주가는 당연히 청산가치에 이를 때까지 폭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산주 열풍의 선도주는 성창기업과 만호제강이었습니다. 이 두 중목은 사상 유례 없는 연속 상한가 기록의 보유자입니다.

만호제강은 23일 연속 상한가 기록을 가지고 있고 성창기업은 25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습니다.

 

<만호제강>

 

전고점으로 이루어진 저항을 돌파 후 조정도 없이 수직급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세가 폭발하는 동안 단 한번도 5주 이평선을 뚫고 내려간 적이 없었음에 주목하시길.

 

<성창기업>

 

성창기업의 차트는 조금 더 재미있지여. 93년 중반에 전고점을 뚫고 올라간 시세는 지지선으로 전환된 전고점 부근까지 되돌림이 발생하였으나 지지받고 신고가를 재경신, 폭발적 시세를 분출했습니다. 이 경우는 5주 이평선과 닿지도 않고 날아가는 수퍼 스탁(SUPER STOCK, 김종철 소장이 이러한 특징을 가진 종목에 붙인 별명)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산주 열풍을 종식시킨 것은 결국 11월 22일 국회가 증권거래법 200조를 폐지는 하되 그 시행시기를 1997년 4월 1일로 유보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적대적 M&A의 발생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자산주들은 꼭지를 칩니다. 쌩쇼를 한 셈이 된 것이죠.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만호제강과 성창기업은 부산에 적을 두고 있는 회사로 이들의 자산가치 저평가를 발견하고 매집했던 세력은 부산지역에 있었던 회계사 그룹이었습니다.

 

4-2. 내재가치 혁명이 시장에 남긴 것

 

비록 내재가치 혁명이 우리 자신이 아닌 외국인들에 의해 촉발되었지만 이는 분명 우리 시장에 가치투자의 문화 내재가치에 대한 개념을 심어주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깨닫는 거지만 대학생이었던 제가 가치투자라는 선진기법에 매혹되어 그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추앙했던 것도 알게 모르게 내재가치 혁명이 이루어높은 투자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여.

 

내재가치는 분명 주식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조주의로 흐르게 되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장은 예전과는 달리 고도의 정보 효율성을 달성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주식들은 내재가치를 따라 움직이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것이 내재가치 혁명이 남긴 긍정적 유산이라면 유산일까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증시 개방이 되기 이전처럼 저PER주와 저PBR주에 투자하는 것만으로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버린 것입니다. 이미 주가는 이러한 것을 반영하여 대부분 올라버렸기 때문이지여.

 

가치투자는 지금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PER, PBR은 가장 기초적인 가치지표이며 성장주에 한해서는 PSR은 살펴보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PER보다는 EV/EBITDA를 더 중요시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는 듯 한데, 앞으로 또 어떤 유행이 불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모든 가치투자 기법의 밑바탕에는 동일한 철학, 즉, '모든 주식은 결국 제 가치를 인정받는다'라는 대전제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대전제는 수학으로 치면 공리(AXIOM)와도 같습니다. 증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점만 잘 알고 가치투자를 행한다면 적어도 편협한 교조주의자로 빠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추세추종철학의 대전제는 무엇일까요?

추세추종철학 또한 아주 단순명료한 대전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시장에는 언제나 주기적으로 추세가 발생한다'라는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추세장은 여러가지 이유로 나타납니다. 달리 말하면 버블은 여러가지 이유로 생겨납니다.

그 이유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때는 PER이 낮다고 올라가고, 어떨 때는 높다고 올라갈지도 모릅니다. 어떨 때는 강력한 정부 육성 산업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올라가고, 어떨 때는 적대적 M&A의 가능성 때문에 올라갑니다. 어떨 때는 국내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내수경기가 활성화되기 때문에 올라가고 어떨 때는 대외적인 기술 버블에 동참하여 올라가기도 합니다. 2007년의 버블에서는 중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이라는 테마가 존재했지여. 중국 관련주가 이 당시 얼마나 크게 폭등했는지는 직접 한번 찾아보시면 좋을 것입니다.

 

각각의 버블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에 의해 촉발되고 강화되지만 그 패러다임이 수명을 다하게 되면 한동안 시장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시장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고 과거에 성공했던 패러다임과 전략, 그리고 무기를 맹신하게 되면 늘 뒷북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기법 또한 부정합니다. 모든 기법은 그것의 바탕을 이루는 특정한 패러다임에서 생겨나는데, 상부구조인 패러다임 조차 유한하거늘 기법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출처:투자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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